사냥의 기억
"레하트 님, 제발……. 조금만 천천히 가십시오! 그러다 넘어지시기라도 하면 저는……."
그레오니의 절박한 목소리가 숲의 정적을 깨뜨렸다. 하지만 앞서가는 레하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덤불 사이를 헤치며 나아갔다. 그의 손에는 왕성에서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투박하게 깎인 물푸레나무 새총이 꽉 쥐어져 있었다.
"괜찮아, 그레오니. 마을에선 이것보다 더 험한 숲도 매일같이 다녔는걸."
레하트가 뒤를 돌아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레오니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위사로서 성내 인원을 보필해야 하는 그에게, 왕의 후보가 '직접 새를 잡아 요리해 먹겠다'며 새총 하나를 달랑 들고 숲으로 뛰어든 상황은 그야말로 재앙에 가까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레하트의 모습이 썩 기꺼웠으며 낯설지 않았다. 왕성 안의 태생부터 고귀하다고 여겨지는 이들과 달리, 레하트는 가끔씩 그레오니와 같은 평민 출신만이 공유하는 투박한 공기를 전신에 두르곤 했다. 그것은 그레오니가 레하트에게 위사로서의 경외심과는 다른 형질의 본능적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쉿, 저기 봐."
레하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높은 나뭇가지 위에 산비둘기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전서구와는 확연히 다른 빛의 깃을 가지고 있었다. 레하트가 새총을 들어 올리자, 그레오니는 조심스럽게 레하트의 뒤로 다가갔다. 그는 레하트의 손 위로 자신의 커다랗고 거친 손을 겹쳤다.
"자, 여기를 조금 더 당기시고……. 숨을 참으세요."
두 사람의 호흡이 하나로 모이는 찰나, 돌멩이가 허공을 가랐다. 작은 규모의 둔탁한 소리와 함께 새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레하트가 아이처럼 기뻐하며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며, 그레오니는 가슴 한구석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구박받는 위치에서 막내로만 살아온 그에게, 누군가를 돕고 그 기쁨을 공유하는 이 순간은 어른이 된 듯한 충만함을 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태양의 조도가 낮아진 저녁 시간대가 찾아왔다. 성벽 아래, 두 사람은 감시의 눈길이 닿지 않는 외진 공터에 나란히 앉았다. 그레오니가 조금 젖은 잔가지와 웅덩이에 처박혀 있던 부서진 가구 조각을 모아 피워 올린 눅눅한 모닥불 위로 고소한 냄새가 번졌다. 레하트는 곱게 직조된 옷감의 짜임새 틈으로 흙먼지가 알알이 달라붙은 무릎을 모으고 앉아 검붉게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마을에 있을 때는 이 연기 냄새가 매일같이 났었는데. 그때는 이마의 인 같은 건 신경도 안 썼어. 이게 뭔 줄도 몰랐지. 어머니께서도 생전 굳이 숨기라고 하지 않으셨고, 마을 사람들도 내 이마를 보며 왕이 될 상이라느니 하는 이상한 소리는 안 했거든. 그저……. 불 앞에 앉아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고민하는 게 전부였지."
레하트의 목소리에는 옅은 그리움이 묻어났다. 왕성에 온 뒤로 모든 정체성을 압도하는 총애자라는 명명 아래 구속받아야 했던 답답함이, 그레오니와 함께하는 이 투박한 식사 시간만큼은 걷히는 듯했다.
"레하트 님, 여기선 앞머리를 조금 걷으셔도 됩니다. 아무도 보지 않으니까요."
그레오니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는 부분적으로 검댕이 묻었으나 대체로 잘 익은 고기를 넓은 잎사귀에 받쳐 레하트에게 건넸다. 레하트는 조심성 없이 고기를 한 입 베어 물고는 뜨거운 육즙에 입술을 데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맛있어, 정말로……. 옛날 생각이 나."
레하트가 입가에 기름기를 묻히며 맛있게 먹자, 그레오니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레하트가 먹기 편하도록 남은 살코기를 정성껏 발라냈다.
"저희 집은 식구가 많아서 이런 건 꿈도 못 꿨습니다. 마지막 순서인 제 입까지 내려오는 몫은 없었던 편이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레하트 님께 드릴 수 있어서 좋습니다. 제가 누군가를 챙겨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요."
그레오니의 투박한 고백에 레하트는 잠시 먹던 것을 멈추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불꽃에 비친 레하트의 눈동자는 잉걸을 만난 무쇠처럼 평소보다 더 깊고 단단해 보였다.
"있잖아, 그레오니. 잘 기억해 뒀으면 해. 올해, 아네키우스력 7403년……. 촌마을에서 온 '레하트'로서 내가 네 앞에 있는 건 올해가 마지막이야."
갑작스러운 레하트의 선언에 그레오니의 손길이 멈췄다. 레하트는 선정인을 가리지 않은 채,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성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성인이 되면 나는 성별을 정하고, 왕이 되거나 혹은 다른 누군가가 되겠지."
"아, 네……. 그렇죠.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네요. 그게 레하트 님의 일이니 말입니다."
"지금처럼 체통 없이 냄비 요리를 탐내거나, 새총을 들고 뛰어다니거나, 너와 마주 앉아 깃털을 뽑고 손에 기름을 묻히며 고기를 뜯는 일은 다시는 없을지도 몰라. 아니, 분명 없을 거야."
레하트는 다시 그레오니를 보며 나직하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내가 조금 더 커다란 거인을 연기하는 그런 날이 오더라도 지금의 작은 나를 잊지 말아 줘."
"지금의 레하트 님을요?"
"만약 네가 이 모습을 영영 잊어버린다면……. 나는 조금 슬플 것 같아."
그레오니는 순간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앞의 소년은 곧 다가올 거대한 운명을 요령껏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지금 이 순간의 진솔한 자신을 누군가의 기억 속에 박제하고 싶어 하고 있었다.
그레오니는 제 손에 묻은 기름기를 바지에 슥 문지르고는, 레하트의 앞에 놓인 잎사귀 위로 가장 부드러운 살점을 하나 더 올려놓았다.
"잊지 않겠습니다. 절대로요. 레하트 님이 어떤 분이 되시더라도……. 오늘 이 연기 냄새와, 새총을 쏘던 모습과, 지금 이 맛만큼은 제가 끝까지 기억하겠습니다."
별 것도 아닌 요소들의 갈급한 나열이었으나 레하트는 그제야 안심한 듯 다시 고기를 입에 넣었다. 배연은 여전히 습기가 어려 매캐했고 성벽은 터무니없이 높았다.